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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사진작가는 셔터를 누른 뒤 90도 인사를 했다

부알_못 2021. 3. 2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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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 현 작가 촬영장서 만난 참전용사 6명

왼쪽부터 9사단 박창훈, 8사단 강재원, 야전공병단 1108 김학철, 2사단 안형근, 9사단 이형귀, 202병기단 이철옥. 김아현 인턴기자


“여기 오니 기분이 참 좋네. 이름 석 자 꼭 실어. 우리가 싸웠다는 사실을 알려줘.”

박창훈, 강재원, 김학철, 안형근, 이형귀, 이철옥. 이들은 70년 전 한국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다. 이들은 지난 19일 한 사진작가의 촬영 제안에 서울 잠실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6층에 모였다. 라미 현 작가의 ‘Project Soldier kwv’ 전시장 한켠에 마련한 스튜디오였다. 촬영자는 사진작가 라미 현(Rami Hyun·본명 현효제). 그는 지난 2017년부터 국내·외 참전용사를 만나 사진을 찍고 있다. 현재까지 모델 수만 1400여명이다.

찍고 90도 인사하고, 또 찍고 또 인사하고. 촬영은 사뭇 특이하게 진행됐다. 6명의 참전용사는 한 명씩 차례로 마스크를 벗고 카메라 앞에 섰다. 구부정했던 허리는 카메라 앞에서 아주 잠깐, 시원하게 펴졌다. 마치 젊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곧은 자세였다. 라미 현 작가는 사진을 찍고 난 후 90도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작가의 목소리가 스튜디오에 쩌렁쩌렁 울렸다.

촬영 후 인사하는 라미 현 사진작가. 김아현 인턴기자

“젊은이들, 옛날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아”

오랜만에 모인 할아버지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박창훈(90)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9사단 수색대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백마고지·김화지구 전투 등에 참전했다고 한다. 박씨는 전투에서 수류탄 파편을 맞아 다쳤다. 박창훈씨 이야기를 듣던 이형귀(91)씨는 “같은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를 여기서 만나네”라며 박씨 손을 잡았다.

같은 부대 소속이었던 이들은 1951년 봄부터 함께 전투에 나갔다. “백마고지를 빼앗기면 방어선이 없어. 그래서 그걸 막아야 하는 거야. 포탄이 얼마나 떨어지던지 온 바닥이 시체였어. 말도 못해.”

잠깐 당시를 생각하던 이형귀씨는 전시장 의자에 앉아 우렁차게 백마고지 노래를 불렀다. 전시장 전체에 그의 노래가 울렸다. 그는 “이 노래가 없었다면 전쟁터에 서 있지 못했어. 전쟁통에서 이 노래를 얼마나 세게 불렀던지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해”라고 말했다. 악을 쓰고 노래를 부르며 전쟁을 견뎠다는 이씨 손목에는 아직도 중공군에게 찔려 생겼다는 흉터가 선명했다.

전시장을 둘러보는 참전용사들. 김아현 인턴기자


이철옥씨는 전시장을 둘러보며 “당시 상황은 말로 할 수가 없어. 산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국전쟁 때) 어디선가 만났던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속 참전용사들을 가리킨 말인 듯했다.

안형근씨(90)는 전시장을 둘러보다 라미 현 작가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진가가 부잣집 아들인가. 어떻게 이런 큰일을 혼자 다 하냐”면서 “좋은 일을 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강재원씨는 “48개월을 전쟁터에 있었다. 손자들에게 할아버지가 이런 일을 했다고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손자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우리가 전쟁에서 싸운 거 전부 다 이야기는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홍보하니까 기분이 너무 좋다”며 “가끔은 젊은이들이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다”고 덧붙였다.

사진 액자를 바라보는 참전용사. 김아현 인턴기자


작가는 오늘 찍은 사진을 바로 인화해 액자로 선물했다. 사진을 받아든 이들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고 또 봤다. 한 참전용사는 이미 비닐봉지에 넣은 사진을 다시 한번 꺼내 한참을 들여다봤다.

촬영 이튿날 박창훈씨의 아들 박영덕(65)씨는 “평소 수면제를 드시고 주무시던 아버지는 사진 촬영을 하고 오셔서는 수면제 없이 주무셨다”며 “즐겁고 바쁜 하루를 보내 정말 기뻐하셨다”고 전했다.

함께 만드는 전시

촬영 전 옷을 정리해 주는 라미 현 사진작가. 선물을 전달하는 롯데백화점 관계자. 김아현 인턴기자


촬영 현장에는 라미 현 작가를 돕는 앳된 얼굴도 눈에 띄었다. 봉사자로 함께한 국가유공자 이성엽씨다. 그는 참전용사들을 맞이하고 액자를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씨는 작가에게 “돕고 싶다”고 직접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은 없어진 전투경찰이었는데 사행성 오락실 단속을 나갔다가 허리를 다쳐 수술을 받았고 이후 국가유공자가 됐다”며 “(참전용사를) 직접 만나 감사를 전할 수 있어서 너무 기분이 좋았고 건강히 지내시라고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6·25전쟁 61주년을 맞아 사진작가 라미의 작품들을 통해 전쟁의 상흔을 넘어선 그들의 신념과 자부심을 기억하고자 한다”며 “다음 세대를 위해 기록을 남기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다시 한번 영웅으로 기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라미 현 작가도 “참전용사를 기억할 수 있고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다 같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사진전 ‘Project Soldier kwv’는 오는 4월 25일까지 서울 송파구 ‘에비뉴엘아트홀’에서 열린다.